본문 바로가기
골프? 골프!!

한국 최초 여성 프로골퍼 역사의 시작과 KLPGA 창설

by crave23 2023. 4. 3.

한국 최초 여성 프로골퍼 역사의 시작과 KLPGA 창설은 아주 의미가 깊습니다.

 

한국 여성프로의 탄생

1978 05 26일 ‘로얄컨트리클럽(현 레이크우드컨트리클럽)’에서는 KPGA(한국프로골프협회)에서 주관한 남자 프로테스트가 진행 중이었고 한쪽에서는 제1회 여자 프로테스트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978년 05월 26일 첫 KLPGA 프로테스트를 통과한 故안종현, 故한명현, 강춘자, 故구옥희 프로(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사진출처: KLPGA

3일 동안 테스트를 치르면서 강춘자. 한명현, 구옥희 선수의 스코어가 마지막까지 접전을 이루었으나 마지막에 강춘자 가 버디를 잡으면서 한국여자프로 1번의 영예를 얻었습니다.

 

이어 한명현 선수, 구옥희 선수, 안종현 선수가 차례로 2번부터 4번까지 한국여자프로 회원번호를 얻었습니다. 고인이 된 안종현 프로는 당시 74타로 프로테스트를 통화했는데 이후 자신을 소개할 때 “74타 안종현입니다.”라고 하며 주변사람들을 즐겁게 했다는 얘기도 전해집니다.

 

그 대회를 시작으로 같은 해인 1978 08월 김성희 프로, 이귀남 프로, 배성순 프로, 고용학 프로가 추가로 프로 테스트를 통과하며 1세대 여성 프로골퍼 구성원이 완성되었고 그 해 09 20일 한양컨트리클럽에서 국내 최초로 여자프로골프선수권대회인 KLPGA 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여자프로 2번으로 등록된 한명현 프로가 우승컵을 차지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KLPGA협회가 독립적인 협회가 아닌 KPGA협회 안에 여자부를 개설해서 운영되는 형식이었고 여자프로가 출전할 수 있는 대회도 거의 없다시피 했습니다.

 

1978KLPGA선수권대회를 시작으로 1979년에는 KLPGA선수권대회를 비롯해서 삼양오픈, 쾌남오픈 등의 여자프로대회가 개최되었고 각각의 대회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안종현 선수, 강춘자 선수, 구옥희프로가 우승컵을 나눠가졌습니다.

그중 쾌남오픈에는 역사적인 에피소드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쾌남오픈은 1979 10월에 개최되었는데 대회 첫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때문에 이후 일정은 모두 취소되었고 첫날 성적만을 적용해서 구옥희 프로가 우승을 차지했었습니다.

 

남자프로대회의 일부를 나누어 진행되었던 여자프로대회는 상금과 규모 등 남자프로대회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았고 1년에 개최된 경기의 수도 채 10개도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여자프로부 고문을 맡고 있던 김성희 프로는 각각의 컨트리클럽에 속한 부유층 여자회원들이 만드는 모임인 숙녀회월례회등에서 후원을 받아가며 시합을 얻어야 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여자프로협회는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큰 열정과 기량을 지닌 선수들을 담기에 국내 여자프로대회는 개최되는 수가 너무 적었고 선수들의 시합에 대한 갈증은 커져만 갔습니다. 그들은 결국 일본으로의 진출을 본격적으로 감행하게 됩니다.

 

일본의 야구감독이었던 가네다 쇼지의 초청을 시발점으로 1982년 구옥희, 강춘자, 배성순, 안종현, 한명현 프로 등은 일본프로대회에 진출하게 됩니다. 1983년 상반기 일본 프로테스트에서 한명현 프로는 초청선수 자격으로 일본프로테스트에서 최초로 테스트를 통과한 한국여자선수가 되었습니다.

 

1983년 후반기에는 구옥희 프로가 프로테스트를 통과하였고, 1984년에는 강춘자 프로가 1위의 성적으로 일본프로테스트에 통과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언어의 장벽도 높았고 불합리한 심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특히 한국인이라 더했을 듯) 김치, 마늘냄새가 난다는 조롱도 견뎌야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도 구옥희 프로는 한국 여성프로골퍼 최초로 1984년 일본프로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게 됩니다. 여세를 몰아 구옥희 프로는 그다음 주에 열린 대회에서도 우승을 하며 JLPGA에서 2주 연속 우승을 달성합니다.

 

이후 구옥희 프로는 JLPGA 통산 23승이라는 경이에 가까운 기록을 달성하였으며 한국여자골퍼들의 해외진출의 물고를 텄습니다. 구옥희 프로는 미국무대로 활동영역을 넓혀갔습니다.

 

1984년 미국 LPGA 대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구옥희 프로는 그 대회에 일본프로 자격으로 참가해 3위를 차지합니다. 자신감을 얻은 그녀는 미국행을 결심하고 1985 USLPGA 퀄리화잉스쿨을 통과하고 1988년에 USLPGA 스탠더드 레지스터클래식에서 우승, 한국여자골프의 위상을 널리 알리게 됩니다.

 

KLPGA협회 창립

1988, 드디어 여자프로협회가 남자프로협회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합니다. 정식으로 KLPGA협회가 창립된 것입니다. 1978년 단 8명의 회원으로 출발한 여자프로부는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회원수 50명의 단체로 성장하였고, 협회 독립이라는 성과를 달성합니다.

 

KLPGA는 당시 3,000만 원을 지원해 주며 KLPGA의 독립을 응원했습니다. KLPGA 창설은 불모지와 다름없었던 여자프로부 소속 선수들이 열정과 노력, 인고의 시간을 견뎌낸 결과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었고 향후 KLPGA의 토대였습니다.

 

KLPGA 창립멤버이자 회원번호 1번이며 국내 통상 10회 우승 강춘자 프로,

 

KLPGA 창립멤버이자 회원번호 2번이며 국내 통상 7회 우승의 한명현 프로,

 

KLPGA 창립멤버이자 회원번호 3번이며 국내 통상 우승 20회를 비롯해 해외 우승 24(USLPGA 1/JLPGA 23)를 기록한 故구옥희 프로(한국 명예의 전당 헌정 1호 선수),

 

KLPGA 창립멤버이자 회원번호 4번이며 여자프로부의 대회 개최를 위해 후원처를 찾아다니며 동분서주했던 KLPGA 초대 회장인 김성희 프로

 

이 분들이 계셨기에 우리는 세계적인 선수 박세리 프로를 한국인의 자긍심으로 여길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KPGA, KLPGA 모두 통틀어 보더라도 한국의 골프역사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골프의 발원지인 스콜틀랜드에 비하면 한국 골프의 역사는 새발의 피나 다름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골프는 이미 세계적인 위상을 떨치고 있습니다.

 

한국 최초 여성프로골퍼 역사의 시작과 KLPGA 창설을 함께 한 그녀들의 행보는 아직까지도 후배 선수들의 귀감이 되고 있으며 프로 선수라면 한 번쯤은 꿈꾸는 이력이 소유자들이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