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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골프!!

대한민국 프로 골프의 아버지 연덕춘 선수와 KPGA

by crave23 2023. 4. 3.

대한민국 프로 골프의 아버지 연덕춘 선수와 KPGA의 역사는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연덕춘 선수는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골퍼입니다. 1916년생인 연덕춘 선수는 200488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국 프로골프의 역사로 존재했으며  KPGA는 그의 골프 인생의 한 획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연덕춘 프로는 한국프로골프협회(KPGA)에 1번으로 등록되어 있으며 연덕춘 프로가 별세한 후 KPGA덕춘상(최저타수상)’을 제정, 매년 국내 투어 선수 중 평균 최저타를 기록한 선수에게 시상하며 그를 기리고 있습니다.

 

국내 1호 프로의 탄생

연덕춘 프로는 지금의 서울 뚝섬(구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뚝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은 군자리 골프장과 가까웠기 때문에(지금의 서울 성동구 능동에 있는 어린이공원 자리) 지나치며 골프라는 것을 처음 접하게 됩니다.

 

1932 16세였던 연덕춘 프로는 처음으로 골프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군자리 골프장에서 캐디로 근무를 시작합니다. 그때 군자리 골프장 캐디 마스터(캐디 대표)가 그의 조카였는데 조카의 제안으로 캐디 마스터실 보조로 근무를 하게 됩니다.

 

당시 군자리 골프장에는 시라마스라는 일본인 프로 골퍼가 골프장 소속 프로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는 골프장 회원뿐 아니라 캐디, 캐디보조, 직원들에게도 골프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평소 어깨너머로 다른 사람들이 플레이하는 모습을 보며 골프에 관심이 생긴 연덕춘 프로는 시라마스에게 얻은 골프채 한 자루로 골프를 시작하게 되었고 밤새 연습을 하는 등 본격적으로 프로의 꿈을 키우기 시작합니다.

 

연덕춘 프로는 골프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골프를 시작한 지 불과 1년만에 이븐 파(Even Par)를 칠 정도로 기량을 뽐내기 시작했고 군자리 골프장은 그는 프로 골프로 키우기로 결정합니다. 이어 1934년 그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으로 골프유학을 갔습니다.

 

그는 일본의 가나가와현에 위치한 후지사와골프클럽에서 골프 레슨을 받기 시작했으며 그의 스승은 1933년 일본오픈에서 우승한 클럽 소속 헤드프로 나카무라였습니다.

 

연덕춘 프로는 오로지 연습에만 매진을 했고 그의 부단한 노력과 타고난 재능이 빛을 바라며 1년이 채 되지도 않아서 프로 골퍼가 되었습니다. 1935 02월 일본 관동골프연맹에서 프로자격증을 획득하게 됩니다. 한국 최초의 프로 골퍼가 탄생한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그가 보여준 모든 행보들은 한국인 골퍼 1호로 기록이 되기 시작합니다.

 

연덕춘 프로의 활약

1935년 그는 일본오픈에 처음으로 참가했지만 예선 탈락을 하게 됩니다. 그해 여름에 사고로 친행 부부가 사망하자 조카 둘을 맡아 키우기 시작했으며 같은 해 가을 한 살 아래의 이난순과 결혼을 했습니다. 이후 슬하에 5남매를 두었고 모두 7명을 부양합니다.

 

1941년 연덕춘 프로는 도전 6번째 일본오픈에서 우승을 합니다. 이는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 함께 일제 강점기 하에 한국인의 위상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선수를 3타 차이로 이겼으며 2라운드부터는 선두를 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기록은 4라운드 합계 2 오버 파인 290타였으며 당시 그의 나이 25세였습니다.

 

당시 일본오픈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 전 마지막 경기였습니다. 연덕춘 선수의 우승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큰 화제였으며 대회 다음날 05 11일 동경일일신문에 대서특필 되었고 이후 톱프로 연덕춘론이라는 칼럼이 게시되기도 했습니다.

 

연덕춘 프로는 태평양전쟁과 6.25를 겪으면서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6.25 때 큰 아들을 잃었고, 자식처럼 키운 여조카도 세상을 뜨게 됩니다. 전쟁으로 골프장은 폐쇄가 되었고 프로들은 일자리를 잃고 골프장은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습니다.

 

30대 절정기에 페어웨이 한번 밟지 못했던 연덕춘은 그런 와중에도 박명출, 한장상, 김승학 등 한국 골프 1세대를 배출해 냅니다. 그리고 1956년 그는 제 4회 캐나다컵 국제골프선수권대회(현 월드컵 골프대회)에 한국 대표로 첫 국제대회에 참가했습니다.

 

대회주관 협회가 일본에서 활약한 연덕춘 프로에게 초청장을 보낸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1개국에서 2명의 선수가 짝을 이루는 방식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는데 국내 공인 프로가 연덕춘이 유일했기 때문에 서울컨트리클럽에서 선발전을 통해 뽑힌 박명출 선수와 같이 출전을 하였습니다.

 

같은 해 07월 잉글랜드 웬트워스 골프클럽에서 개최된 월드컵에도 출전한 한국은 29개국이 참가한 단체전에서 24위를 기록했고 연덕춘 프로는 개인전에서 24위를 기록했습니다. 한국프로골프협회(KPGA)가 창립되기도 전인 데다가 프로 골프대회가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던 한국 선수들이 처음 낸 성적은 가히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한국은 1971 09월 미국 플로리다 팜비치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한장상과 김승학 선수가 5위를 기록했고 2002년 월드컵에서는 최경주와 허석호 선수가 3위를 차지하는 등 역대 최고의 성적을 올린 바 있습니다.

 

연덕춘 프로는 1958년 한국프로골프선수권대회 초대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1963년 그는 프로 골퍼의 친목회인 프로골프회를 만들었습니다. 프로 골퍼의 자격을 인정하는 절차와 프로가 지녀야 할 덕목이 기재된 회칙이 만들어졌습니다.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창립

1966 05 30KPGA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한국골프협회가 창립되었고 이후 프로골프회는 프로골프 선수들의 독자적인 기구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 1968년 한국프로골프협회(KPGA)를 창립하였습니다.  연덕춘 프로는 상무 겸 징계위원장을 맡았습니다.

 

KPGA는 창립회원으로 회원 번호 1번인 연덕춘 프로를 비롯해서 신봉식, 박명출, 배용산, 김복만, 한장상, 한성재, 김성윤, 홍덕산, 이일안, 문기수, 조태운(2~12) 12명이었습니다. 연덕춘 프로는 1972 2KPGA 회장에 올랐습니다.

 

연덕춘 프로가 사용한 골프채 4점은 2012 08 13일 등록문화재 제500호로 지정되어 현재 충남 천안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비록 대한민국 프로 골프의 아버지 연덕춘 선수는 고인이 되셨지만 그가 세운 한국 프로 골프의 역사는 길이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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